LG경제연구원 '독일 경제가 위기에 강한 이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이 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그 위상과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제조업 강국이었던 일본은 만성적 저성장과 디플레이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남유럽국가들은 현재 위기의 한가운데 있다. 반면 독일은 안정세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이번 유로화의 위기를 계기로 독일 경제의 재정 건전성이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독일의 경우 2009년 GDP가 전년에 비해 마이너스 5%를 기록하는 상황에서도 경상수지 흑자를 이루고 실업도 늘어나지 않는 경제 운영 성과를 보여주었다. 독일의 경제운영의 강점은 같은 유로화를 도입한 유럽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돋보이는 것이며, 미국과 일본과 같은 경제 대국과 비교하여도 양호한 정책적 성과를 보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에서는 독일 경제가 지난 20년간 겪은 변화를 점검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동인을 살펴본다. 위기 극복의 동인으로는 동서독 통일에 이은 유럽통합, 강한 제조업 전통과 개혁을 통한 제조업 전문화, 그리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정부 정책에 의한 기업의 미래 대응력 확보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수출주도형 독일 경제의 지속적 성장은 유사한 경제구조를 가진 우리에게도 적지않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것이다.
< 목 차 >
Ⅰ. 글로벌 위기와 독일 경제의 최근 성과
Ⅱ. 독일 경제의 활력 회복, 어떻게 가능했나
Ⅲ.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지난 경제위기 과정에서 많은 국가들은 경제의 몇몇 취약점이 또 다른 위기로 전이되며 경제 전반으로 위험이 확대되는 과정을 겪은 바 있다. 미국의 경우는 부동산에서 시작된 경기침체가 소비와 노동시장의 침체로 이어졌고, 일본의 경우는 제조업 설비투자 부진과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으며, 아울러 막대한 재정적자로 인해 적절한 위기 대응을 위한 추가적인 재원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남유럽 국가들에서 촉발된 유로화의 위기는 여타 유로권 국가들까지 큰 혼란에 빠지게 하고 있으며, 몇몇 국가들은 여전히 재정적자로 인한 신용등급 하락과 국가 부도의 위기에 처해 있기도 하다.
반면 독일은 경제 위기 과정에서도 실업률 등이 꾸준한 안정세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이번 유로화의 위기를 계기로 독일 경제의 재정 건전성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독일 경제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통일 후유증으로 지속적인 실업증가 및 소비침체의 악순환을 경험한 바 있다. 많은 서구의 언론들이 당시의 독일을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라고 비웃곤 했었다. 하지만 독일은 일회성 경기 부양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경쟁력 회복에 중심을 두고 경제를 운영해 왔다. 최근 독일 경제의 성과를 살펴보고 그 원인을 분석해보기로 한다.
Ⅰ. 글로벌 위기와 독일 경제의 최근 성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몇몇 경제성과 면에서 주목할 만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강점은 특히 수출에서 나타나고 있다. 독일은 선진국들 가운데에 예외적으로 상당히 강한 수출주도형 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2003년 이후 미국을 넘어서 이른바 세계 수출의 챔피언(Export Weltmeister) 자리를 유지하였다. 국내총생산(GDP)은 미국 GDP의 1/4, 일본의 3/4 수준이지만 수출에서만은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킨 것이다. 다만 이번 경제위기를 겪으며, 전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는 중국이 2009년 드디어 수출에서 독일을 넘어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그림 1> 참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독일의 수출 증가 속도이다.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 수출구조로 인해 시장이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2000년대에 연평균 13.1%의 수출증가율을 기록하였다. 아직 저가 범용제품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24.4%에 비해서는 낮지만 미국과 일본의 6.4%, 6.1%에 비해서는 두 배 이상의 성장세를 보인 바 있다. 또 이는 수출이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같은 기간 수출증가율(11.9%) 보다 높은 것이다.
특히 유로화가 강세를 지속한 지난 수년간 보여준 독일의 수출 성과는 주목할 만 하다. 유로화는 저점이었던 2000년 10월 이후 2010년 3월까지 중국 위안화 대비 31%, 일본 엔화 대비 33%, 미국 달러 대비 59%, 한국 원화 대비 60% 절상된 것으로 나타난다. 어려운 환율 여건에서도 지속적으로 높은 수출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 환율 절상을 넘어서는 생산성의 증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독일 경제의 위기 대응과 관련해 주목할 부분으로 경기 위축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번 위기로 인해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업률이 급격히 상승한 2007년 2분기에서 2009년 4분기까지(미국 4.5% → 10.0%, 스페인 8.0% → 19.0%, 영국 5.1% → 7.8%, 일본 3.8 → 5.2%) 독일은 8.5%에서 7.5%로 실업률이 낮아졌으며, 향후에도 경기 회복에 따라 기계류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빠른 고용 회복이 예상되고 있다. 더구나 독일의 GDP는 지난 2009년 경제위기로 인해 마이너스 5%를 기록하였다. 과거 경기침체기에 항상 GDP의 감소 폭을 훨씬 넘는 실업률 증가를 보여오던 독일이 이번 위기 시에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재정 건전성을 지적할 수 있다. 독일 또한 금융 위기로 인한 재정 확대로 재정 건전성이 악화되기는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안정적인 재정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2009년 재정 적자는 GDP대비 3.3% 규모로 아일랜드의 14.3%, 그리스의 13.6%, 스페인의 11.2%, 영국의 11.1% 등 유럽국가들이나 미국 9.9%, 일본 7.4%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특히 2009년 헌법에 연계한 재정 건전화 법안을 만들어 GDP 대비 0.5%만의 적자를 허용하는 엄격한 재정적자금지정책(Schuldenbremse)을 2011년 회계연도부터 적용할 예정이다. 이러한 엄격한 정책의 추진과 함께 현재 정부 부채 또한 GDP대비 70%대에 머물고 있어 선진국들 가운데에 가장 빠른 수준의 재정 안정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그림 3> 참조).
Ⅱ. 독일 경제의 활력 회복, 어떻게 가능했나
독일 경제는 이른바 ‘라인 자본주의’라고 불린다. 이 용어는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금융그룹 AGF 회장을 역임한 미셸 알베르가 영미식 자본주의와 대비를 이루는 형태의 자본주의로 독일 경제를 지칭하며 처음 명명하였다. 독일 경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이유로 라인 자본주의라 불리게 되었다. 먼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통해 패전을 극복한 독일, 그리고 라인강변에 위치한 구(舊) 수도 본(Bonn)을 중심으로 한 정치와 경제의 유기적 결합, 마지막으로 독일 사민당(SPD)이 라인강변에 위치한 고데스베르그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게 된 것(Godesberger Programm)이 독일 경제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된다.
대체로 학자들은 전통적인 라인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으로 주식시장보다 은행을 통한 자본 조달, 은행과 기업과의 긴밀한 연계구조, 노사간의 사회적 파트너십, 실업교육을 통한 숙련된 근로자, 규제된 시장 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특징들 가운데에 몇몇 특징은 현재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은행과 기업과의 연계구조와 같은 특징은 2000년대 초반 슈뢰더 총리의 금융 개혁 과정에서 많이 약화되기도 하였다.
1. 독일 통일과 라인 자본주의의 위기
독일은 전후 연평균 4%가 넘는 지속적인 성장과 8%가 넘는 수출 증가율, 12% 수준의 저축률로 1980년대까지 지속적 성장을 이루며 유럽을 대표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급작스럽게 진행된 독일 통일과 함께 역설적으로 독일 경제에는 큰 주름살이 드리우게 되었다. 통독으로 인한 재정지출이 급증하고 서독(Deutsche Mark)과 동독(DDR Mark)의 1대1 화폐 통합으로 인해 동독 지역 기업들의 경쟁력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서독 기업들도 단기적인 동독 특수로 인해 손쉬운 매출 확장에 기대어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통일 특수가 소멸하고 난 후 경제 전체가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자 정부, 지방정부, 기업 모두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전자제품, 광학기기, 조선 등 수출을 이끌던 몇몇 산업부문에서 일본 등의 급속한 부상으로 글로벌 경쟁우위를 빼앗기면서 1990년대 연평균 성장률이 1.9%를 기록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되었다. 특히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로 인해 외부의 경기 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아직 유럽 통합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역내시장도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한 정책수단마저 제한된, 그야말로 이중 삼중고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독일은 잠재성장률에 미치지 못하는 성장을 기록한 해가 많았다(<그림 4> 참조).
2. 유럽 통합과 독일의 경쟁력 회복
독일 통일의 후유증을 오래 경험한 독일 경제는 2000년대 들어 점차 활력을 되찾게 된다. 이러한 활력 회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는 유럽 통합과 구동독 지역의 존재, 그리고 낮은 물가 상승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유럽 통합의 효과를 살펴보자. 독일은 통독과 유럽 통합을 통해 두 번에 걸친 내수시장의 확대 계기를 갖게 되었다. 먼저 통독 이후 시장확대에 따른 반짝 효과가 소진된 이후, 1990년대 내내 장기침체를 겪었던 독일은 약 10년 후 유럽 통합을 통해 경쟁력 회복의 계기를 잡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통합으로 인한 단일 시장의 출현은 경제 성장에 긍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유럽 통합으로 인해 단일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역내 교역이 활발해지고, 이를 계기로 각국별 분업의 효과가 극대화 되면서 유럽연합 내에서 전체적인 생산성 증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 통합의 효과를 모든 국가들이 공평하게 나눠가진 것은 아니었다. 세계 경제가 성장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에는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유럽 연합 내에서, 경제 위기 이후 위기에 적절히 대응하는 국가와 대응하지 못하는 국가가 명확하게 나뉘고 있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유럽 국가들과 아일랜드 등이 전자의 대표적 예라면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은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에는 통독 후 감내해야 했던 10년의 장기 침체 시기 동안 지속했던 경제 체질 변화가 유럽 통합에 따른 새로운 시장확대와 함께 성장의 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수출 활력의 거점, 구동독 지역
독일의 생산력이 유럽 통합을 계기로 더욱 높아지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는 독일 통일 이후 하향 안정된 독일의 임금 추이를 지적할 수 있다. 특히 통일 이후 침체를 보이던 구동독 지역은 유럽 통합과 함께 점차 독일 수출 활력의 거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구동독 지역이 수출 활력의 거점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낮은 임금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저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서독 지역에 대한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부차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1999년~2008년 기간 동안 실질임금 상승률이 오히려 연평균 마이너스 0.5%를 기록할 정도로 임금 상승이 억제되었다.
이러한 임금억제 과정은 힘든 구조조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독일 통일 이후 앞서 지적한 1대1 화폐 통합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된 동독의 생산가격으로 인해 막대한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동독지역 기업들은 대규모 파산을 맞이하였고, 이는 동독 지역의 제조업 공동화로 이어졌다. 제조업의 공동화는 다시 동독 지역의 높은 실업률로 이어졌고, 독일 전체의 실업률이 가장 높았던 2004년에는 20%가 넘는 실업률로 전체 독일 사회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독일, 특히 동독 지역의 높은 실업률은 독일 전역의 임금 상승 억제로 이어졌다. 실제로 유럽 통합 이후 많은 기업들은 저임금 동유럽 국가로의 사업장 역외이전을 언급하며 노동자로부터 많은 양보를 받아내고, 최종적으로는 물류와 품질관리에서 불리한 동유럽 국가대신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동독지역을 새로운 사업장의 입지로 선택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라이프찌히에 건설된 BMW의 공장이나, 폭스바겐의 드레스덴 공장을 들 수 있다. 동독 지역의 임금수준은 서독 지역 대비 1992년 55%, 2004년에 66% 수준에 불과하여, 인프라 수준과 높은 생산성을 고려할 경우 각종 법규의 복잡함과 급격한 임금상승에 시달리는 동유럽 지역에 비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동독지역은 점차 독일의 수출전진기지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실제로 국외에서의 주문량 지표가 동독 지역은 2000년 대비 80% 가까이 증가하여 수출 증가를 주도적으로 이어가게 되었다(<그림 8> 참조).
낮은 물가상승률
하지만 독일이 저임금을 통해 주변 국가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이른바 ‘소셜 덤핑(Social Dumping)’의 혐의를 받게 된 것은 실질임금이 낮게 유지되어서만은 아니다. 독일의 경우 지난 10년간 낮은 물가 상승률이 지속되어 낮은 물가에 의한 임금 상승 억제가 가능한 선순환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 1999년~2008년 사이 독일의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1.7% 수준으로 주변국 대비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어 왔다(<그림 9> 참조).
독일이 낮은 물가 상승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럽 통합 요인과 독일 고유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통합 요인은 유럽 통합 이후 역내 국가들 사이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생필품 가격이 낮게 유지되었으며, 유로화 강세로 고유가 등으로부터 충격을 덜 받을 수 있었던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독일이 여타 유럽 국가들보다 낮은 물가를 유지한 데에는 독일의 고유의 물가 안정 요인이 있었다. 가장 큰 요인으로 독일 주택가격이 낮게 유지된 점을 들 수 있다. 독일은 근 30년간 주택가격이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DIW(Deutsches Institut fuer Wirtschaftsforschung)의 연구에 의하면 독일의 실질 부동산 가격은 1975년~2007년 사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부동산 가격과 함께 농산물 가격도 낮게 유지되었다. 남유럽 등지에서의 저렴한 가격의 농산물이 대거 수입되었고 인근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한시적 노동자들을 통해 독일 현지 생산 농산품가격 또한 낮게 유지되어 독일의 물가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유럽 물류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유에서 오는 코스트 경쟁력도 독일이 낮은 물가를 유지하는데 적잖이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3. 경제 성장의 발판으로 부활한 제조업
지금까지 살펴본 물가와 임금 안정, 유럽 통합 효과 등이 독일의 경쟁력 회복을 가능케 한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가운데, 제조업 중심의 장기 투자와 전문화 등 라인 자본주의의 오랜 전통(legacy)이 지속된 점도 위기에 강한 독일 경제의 오늘을 만들어낸 요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제조업 분야의 장기 투자 확대
독일은 1990년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늘려왔다. 제조업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금속 및 기계류 관련 투자는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미국, 영국 등 영미권 국가뿐 아니라 수출 중심의 성장을 지속하던 일본의 경우조차도 금속 기계류에 대한 투자가 정체 또는 감소하고 있는 것과 커다란 대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서비스업 중심의 성장이 고착화된 미국 등 영미권 국가들과는 달리 독일의 경우 제조업 분야로 우수한 인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있다. 여타 국가와는 달리 제조업 분야와 서비스 분야의 임금 격차가 벌어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아직도 BMW나 Bosch와 같은 제조 기업들이 매년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선호되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고, 서비스 부문에 우수 인재가 대거 몰리는 경향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독일의 서비스 산업 부문도 제조업과 깊은 관련을 맺는 방식으로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2003년 독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체 사업체 대상 서비스업 수요의 40%가 제조업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고, 특히 R&D와 관련해서는 약 73%의 수요가 제조업 분야에서 생겨났다. 서비스업 또한 제조업에 기반하여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독일의 제조업은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문화를 통한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
라인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최근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슈뢰더 정부의 산업개혁으로 인해 전통적인 금융산업과 제조기업간의 상호지배가 해소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림 12>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90년대 중반까지도 독일의 기업들은 은행이나 타 기업과의 상호지배를 통해 안정적인 투자와 지배구조의 확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는 외국기업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의 가능성을 낮추어 낮은 수준에서나마 경쟁 제한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과거 독일 기업의 인수 합병은 주거래은행(Hausbank) 차원의 교통정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독일 기업에 필요한 제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자본시장 발달이 늦은 독일의 특성상 독일 기업들은 영미권 기업들에 비해 시가총액이 낮기 때문에 상호지분보유 및 은행의 주식 보유가 외국 기업의 공격을 막는 유용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탓이다.
독일 정부에서는 1998년 기업부문 통제와 투명성 법안(KonTraG, Gesetz zur Kontrolle und Transparenz)을 마련했고, 다음 단계로 2001년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한스 아이헬(Hans Eichel)이 입안한 독일 금융기업의 자본참여 축소에 대한 조세감면 계획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2002년 1월 이후부터는 자본출자 해소에 대한 법인세와 영업세가 이전과는 달리 한시적으로 면제됨에 따라 독일 기업들의 전통적인 상호지분참여 관행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정부의 집중적인 전문화 유도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도이치 방크(Deutsche Bank)가 벤츠에 출자하고 있던 지분이 거의 정리되고, 뮌헨 재보험(Muencher Rueck)과 알리안츠(Allianz) 보험의 상호 지분 결합이 줄어들었으며, 이들 금융기업들의 벤츠 및 상용차 생산기업 MAN에 대한 지분출자가 정리되는 등 독일 산업계 전반의 자본참여가 크게 감소하였다. 독일 은행들의 산업계에 대한 참여가 줄어들면서 전체 독일 기업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른바 ‘독일 주식회사(Deutschland AG)’ 논란도 점차 해소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호간 자본참여의 감소는 각 이해 당사자에게 전문화를 강화하는 긍정적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러한 전문화 추세는 제조 기업들의 해외 기업 인수나 공장 설립을 통한 해외직접투자(FDI) 등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독일 기업들의 글로벌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실제로 독일 기업들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한 해외투자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FDI 투자 금액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4. 국가정책을 통한 산업경쟁력 강화
독일의 환경 산업 경쟁력과 정책의 진화
독일은 현재 환경 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를 다투고 있다. 일찌감치 신재생에너지 육성을 위한 각종 정책을 수립하여 신성장동력 발굴에 나선 독일 정부의 정책 이니셔티브 덕택이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2000년 신재생에너지법(Erneuerbare Energie Gesetz) 제정 이후 신재생에너지 생산이 급증했다. 1990년~1999년까지 연평균 5.7% 성장에 그쳤던 신재생에너지 생산이 2000년~2007년 사이 연평균 14.1%로 두 배 이상 높아졌고, 2009년 현재 전체 전력의 약 16%를 신재생에너지를 통해 조달하고 있다. 아울러 독일 정부는 2020년까지 이 비중을 30% 수준으로, 2030년까지 40% 수준으로 높일 계획이다. 또한 kWh 당 25~45 유로센트에 이르는 보조금을 향후 20년간 보장한다는 강력한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지원에 힘입어 독일기업들은 2009년 태양광 산업 분야에서 Q-cells가 세계시장 점유율 7.2%로 수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Enercon, RePower, Nordex, Fuhrlaender 등 풍력 기업들은 세계 시장의 27.7%를 차지하는 등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환경 산업정책(Oekologische Industriepolitik)으로 불리는 독일의 이러한 정책기조는 최근에는 전기 자동차 규격의 통일 및 지원방안 마련 등 다양한 분야로 진화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위기 기간 중 미국,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신재생에너지 등 친환경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면서, 독일 친환경 산업 분야 기업들의 매출과 고용이 더욱 확대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례로 현재 영국,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이 건설하고 있는 복수의 북해 연안 해상(Offshore) 풍력단지 건설에 독일의 E.on, RWE, Siemens, Hochtief 등 발전, 송전, 건설업체가 다수 참여하는 등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산업 및 경쟁 정책의 진화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독일은 전통적으로 산업정책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나라에 속해왔다. 산업정책 보다는 경쟁정책을 통해 공정한 경쟁 기회의 확보가 궁극적인 산업 경쟁력 확보의 요체라는 점을 전면에 내세워 왔다. 하지만 유럽 통합 이후 사정이 다소 변화하게 되었다. 그 동안 쪼개져 있던 국별 시장이 통합되면서 유럽 전체가 하나의 단일 내수 시장이 된 것이다. 그 결과 경쟁정책 역시 유럽연합 차원의 단일 정책이 관철되면서 점차 개별 국가의 손을 떠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다만 회원국들은 유럽연합의 경쟁정책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기업 지원 정책을 수행하여 일자리를 만들고 연구활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 자연히 정책의 초점이 규제에서 지원으로 맞추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 하에서 현재 독일이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산업정책은 지역별 산학 연계에 의한 기술 개발 지원이다. 함부르크 지역의 항공산업 지원을 위한 연구센터 지원(Luftfahrtstandort Hamburg), 작센 주 인근의 반도체 산업을 위한 지원(Silikon Saxony), 자동차 산업을 위한 지원(Network of Automotive Excellence, NoAE), 괴팅엔 지역의 측정 산업 지원(Measurement Valley)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독일에서는 표준 시장 선점을 통한 자국 기업의 우위 확보를 지원하고 있다. 이미 독일은 독일표준협회를 통해 DIN(Deutsche Industrie Normen)이라는 자국의 표준 규격을 국제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DIN 표준이 독일과 유럽 차원의 표준을 넘어서 글로벌 시장에서 기준이 되도록 각종 지원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국 표준이 국제화될 경우 독일 기업들은 표준 인증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낮은 진입장벽으로 전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라인 자본주의의 전통 하에서 기업들간의 협력에 의한 표준 설정이 활발했던 독일에서는 기업들이 다양한 표준을 서로 내세우기 보다는 단일한 표준을 업계 스스로 마련하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표준 선점에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Ⅲ.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독일 경제의 안정적 성장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통독, 유럽 통합 등 외부적 요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내부의 체질 개혁을 수행한 데에 따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독일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은 독일보다 더 높은 제조업 비중을 가지고 있는 우리 경제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것이다.
특히 제조업의 활력을 확보하면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자본 투자, 전문화된 인력, 특허 등 무형자산이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잘 일깨워 주고 있다.
다음으로 일관된 경제정책의 실행도 중요하다. 독일의 경우 환경정책의 기본기조가 20년 넘게 유지되면서 독일 환경 산업 발전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경쟁정책이나 산업정책도 글로벌 경제정책 변화의 흐름을 한 발 앞서 나가면서 경제 주체들의 미래 변화 대응을 선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제도를 운영하든 위험과 기회는 공존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지난 90년대 독일이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게 된 원인으로도 지적되었던 라인 자본주의 모델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처럼, 경제 제도는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할 경우 국가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이 되며, 낡은 제도도 지속적인 제도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발전의 동력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여타 선진국과 크게 대조되는 위기 극복 능력을 보인 독일 경제의 부활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 경제, 한국 산업의 성장 활력 유지와 체질 강화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끝>
댓글 없음:
댓글 쓰기